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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 기자의 세상 돋보기] 사명감을 잃은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뉴스온라인=최순우의 세상 돋보기] 사명감을 잃은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신문윤리강령 제 15조 ‘신문윤리 실천요강 제15조 언론인의 품위’ 조항에는 언론인 뿐 아니라 언론사도 포함해 ‘취재, 보도, 평론, 편집에 관련하여 이해 당사자로부터 금품, 향응, 무료여행초대, 취재여행의 경비, 제품 및 상품권, 고가의 기념품 등 경제적 이익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언론학계에서는 ‘촌지나 꽁짜 티켓, 경제적 이익을 받은 언론인을 가르켜 “윤락가에서 생존을 위해 몸을 파는 윤락녀"보다 더 못한 하등인간으로 간주할 정도로 언론계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은 더욱 투명성과 올바른 언행으로 사회의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앞장서야 될 중요한 직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윤리강령 제 15조 ‘신문윤리 실천요강 제 15조 언론인의 품위’를 언론사 스스로 저버린 언론사들이 최근에 대장동 의혹의 중심에 있는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에 대한 검찰 수사를 통해 세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파문을 일고 있다. 대장동 개발사업자 화천대유 대주주이자 ‘머니투데이’ 법조팀장이었던 김만배씨와 중견 언론인들이 수억 원 대 돈을 직접 거래하거나 명품 선물, 골프 접대, 현금 및 상품권 등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참담한 언론윤리 실종 사태를 보여주고 있다. 언론 뿐만 아니라 판사, 검사들이 김만배씨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국민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공정과 상식이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던 그들의 민낯에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현재 김만배씨로부터 돈을 받은 언론사로 거론된 곳은 ▲한겨례 9억▲한국일보 1억▲ 중앙일보 9천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실이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자 해당 언론사들은 돈을 받은 소속 기자들을 해직하는 것으로 꼬리 자르기를 시도함으로써 대장동 사태에서 책임회피를 하려 분주하고 있다. 그러나 김만배씨로부터 언론만 돈을 받은 게 아니라 검사, 판사 출신들 또한 김씨로부터 돈을 받은 정황이 자금추적을 통해 드러나고 있지만 검찰은 돈을 받은 언론사들만 수사선상에 올려놨을 뿐 검사, 판사들에 대한 수사는 미적거리고 있어 제 식구 봐주기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돈을 받은 언론사의 대장동 보도, 돈을 받은 검찰의 대장동 수사, 돈을 받고 유·무죄를 판결하는 판사들, 과연 그들이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동시에 과연 돈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자들이 공정과 법·질서를 운운한들 국민들이 신뢰할 수 있을까 이런 처첨한 상황을 목격하다 문득 필자가 학교 다닐 때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언젠가 강의시간에 언론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언론인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사명감을 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언론인이 아니다” 라며 학생들에게 언론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당부했던 그 말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다. 또 필자가 우연히 야인시대를 재 방송으로 보다 극 중 한 검사가 권력에 굽신 거리는 상사들의 모습을 보고 뱉은 대사가 문득 떠올라 지면에 옮기려고 한다. 그 검사는 권력과 결탁한 상사들의 악행을 참지 못해 사직서를 던진다 이에 상사는 “왜 사직서를 던지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검사는“권력의 개가 되느니 밖에 나가서 편히 사는게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사직서를 던진 이유를 밝혔다. 이어 그는 “충성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개처럼 사십시오. 주인을 위해서 실컷 짖다가 그렇게 주인한테 잡혀 먹고 마는 개 말입니다”라며 권력의 손을 잡은 검찰 간부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어 그는 “잘 들어라,이 똥개들아, 열심히 충성하고 계속 짖다가 허망하게 죽을 똥개들아. 권불십년 이라고 했다. 그걸 왜 몰라” 라고 외치는 장면 지금도 뇌리 기억 속에 남는 장면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이라는 뜻은 ‘권세는 십 년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오래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공무원들에게는 뇌물을 받거나 댓가로 경제적인 이익이나 금품을 받으면 법에 따라 배임 수죄 및 또는 뇌물법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지만 언론인들에게는 그에 해당하는 처벌 규칙이 없다. 단지 윤리적으로 즉 스스로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어쩌면 언론관 없는 부패한 기자들이 근절이 되지 않는 원인 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영원한 것이다. 허나 돈과 권력은 한 줌 흙에 불과 한 것이다. 상식을 지키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기자들은 오늘도 이 세상의 정의를 바로 잡기 위해 뛰고 있는데, 앞에서 이끈다는 언론사를 표방한 사이비 신문사들이 앞에선 말만 뻔지르르하게 떠들고 뒤에서 저지르는 온갖 이권개입과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일관한다면 언론인을 꿈꾸는 예비 언론인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지역신문사에 입사할 수 있는 가 반문하고 싶다. 정말 스스로가 참다운 언론인으로 남고 싶다면 측은지심 (惻隱之心)과 사양지심 (辭讓之心) 이 두 가지 고사성어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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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사상적 빈곤 속에 방치된 다문화 가정수십년 전부터 언론과 방송을 통해 다문화 가정의 개선 방향과 해결을 내놓으며 다문화 이주민들을 한국시민들처럼 동등하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수백년간 이어져 온 단일민족을 고수하며 다문화 이주민들과의 사회적 동반자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 관련 취재를 하다보면 많은 이주민들이 사회속에서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물론이고 취업의 제한, 생활 속에서 겪는 문화적 차이 등으로 갈등하고 있는 지를 느끼게 된다. 물론 민족주의는 식민지 해방과 근대화 민주화를 이룩하는데는 기여했으나, 그에 못지 않은 댓가를 요구했다. 그 댓가의 산물이 되버린 단일민족 의식은 한국에 배타성과 편협성을 가져왔고, 사상적 빈곤을 낳았음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단일민족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제 더 이상 단군신화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동남아 신부가 포함된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는데, 단일민족 신화로는 이들을 껴안을 수 없다. 우리의 민족의 소원인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것보다 문화적.종족적 다양성과 관용을 확대해야 한다. 과거 19세기말, 자유주의가 한국에 들어와 보수가 아닌 진보적인 사회의 틀이 마련되려할 즈음. 제국주의가 침범하는 시기와 겹치면서 민족주의에 압도 당했고 이 때문에 사상적으로 빈곤해지고 다양성이 줄어들었다. 민족주의를 폐기할 수는 없고, 보편적,시민적 자유주의로 보완해야만 해답이 나온다. 사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사회가 아니다. 300만명 넘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고, 농촌에는 동남아 출신 여성들이 아내와 엄마로 다문화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런 현실과 의식이 간격을 메우려면, 핏줄을 기준으로 삼는게 아니라 이들을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동등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저 출산으로 인구가 줄고 있는 한국사회가 성장동력을 유지하려면 핏줄에 호소하는 민족 정체성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어느 사회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단군신화는 일제와 맞서야 했던 식민지 시기나 1960~70년대 남북한 체제경쟁을 하던 시대라면 몰라도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민족주의가 통일의 당위성을 호소하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를 진행하는 것은 방해한다. 중국동포도 같은 핏줄이라면서 2등 국민 차별을 하는데, 북한 주민들의 대우는 어떻겠는가?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나온다. 우리사회는 바뀌어야 한다. 이들이 국가구성원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시민적 보편적 자유주의를 확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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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우의 세상 돋보기] 77년 해방에서 고립된 독립군 후손들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하였다. 한국은 카이로 선언과 그것이 다시 확인된 포츠담 선언에 의해서, 그리고 한민족의 오랜 투쟁을 통한 민족의 극복에 의해서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독립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외면적으로 보면 일본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항복을 선언하며 얻은 해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한국의 해방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이름 없는 영웅들이 있었다. 바로 독립군들이 바로 해방의 일등공신들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빼앗긴 조국의 해방을 찾기 위해 허허벌판 만주벌판에서 간악한 일본인들과 싸우며 쟁취해 조국에 해방을 안겨주고 장렬히 전사를 했다. 하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독립군 후손들은 친일파들의 탄압과 국가의 무관심으로 인해 어떠한 대우도 혜택도 받지 못했다. 해방된 뒤에도 독립군 후손들은 배를 곪아가며 이렇다 할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로부터도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7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독립군 후손들은 가난에 몸부림치고 있다. 이처럼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희생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었다. 민족문제 연구소와 한 언론사가 조사한 독립운동가의 생활실태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조사 결과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 중 58%가 무직, 19%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학력은 대졸은 16%에 불과한 반면 중졸 이하와 무학이 50%를 넘었다. 이런 현실에서 약 60%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하층 생활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표적인 예로 독립운동가 권기일 선생은 엄청난 토지를 모두 처분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된 선생이 남긴 것은 독립운동 당시 사용했던 도장 하나가 전부였다. 그의 후손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안동의 항일 운동의 근거지로 사용됐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고택인 ‘임청각’은 후손들이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이석주 후손은 무려 1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 이 과정에서 집안 장손 4대가 희생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후손들은 집의 명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석주 선생의 한 후손은 “독립운동가 10여 명이 나와도 집도 바로잡아 놓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라고 한탄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나선 독립운동가들이 후대에 영화를 누리기 위해 가족들을 등진 채 자신을 희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국가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려고 나설까. 친일파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이 줄을 잇는 가운데 선조의 땅 찾기를 포기한 한 독립운동가의 외침은 이 땅의 씁쓸한 현실을 보는 듯했다. “친일파 후손들은 법의 보호를 받아서 땅을 찾고 독립운동한 사람은 법이 없어서 땅을 못 찾는다. 어떻게 매국노의 재산은 법이 뒷받침되어서 찾을 수 있고 독립운동한 사람의 재산은 법이 없어서 못 찾아준다. 이게 나라라고 할 수 있나.” 권기영 독립운동가 후손이 남긴 말이다.